[광복 76주년, 골목의 역사를 만나다] 한반도의 또 다른 최전선 '부산'

이슈&피플 입력 2021-11-07 12:00:00 수정 2021-12-24 17:13:49 박진관 기자 0개

페이스북 공유하기 트위터 공유하기 카카오톡 공유하기 네이버 블로그 공유하기

실물경제 정보를 정확하고 빠르게 제공해 온 서울경제TV는 2021년 광복 제76주년을 맞이해서, 마치 우리 주변에 원래부터 있었던 것처럼 가볍게 지나쳐 온 역사적 유적과 유물에 대해 ‘아카이브 기획 취재’를 통해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과거의 흔적을 다시 한 번 되짚어 봄으로써 오늘의 대한민국이 누리고 있는 눈부신 과학기술의 발전과 문화적인 성과들이 험난했던 그때를 살았던 선조들의 의지와 극복 과정이 없었다면 어림없는 일이었을 수도 있음을, 자라나는 미래의 세대들에게 제대로 알리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진행된 이번 기획 취재는 임진왜란과 구한말 혼란기, 일제치하를 거치면서, 반드시 영광스럽지만은 않은 유적과 유물일지라도 역사적 고초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내면에 간직되어 온 아픈 흔적들조차 끌어내고 보존해 나가야 함을 강조하려 합니다. 자주 만나지 못하는 친족보다 오히려 가깝게 지내는 이웃이 더 소중히 느껴질 때가 있듯이 눈에 보이지 않으면 잊힐 수밖에 없게 되고, ‘아픔’이 담긴 유물이라는 이유로 관리가 소홀해진다면 자칫 그 과오는 반복될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간도, 연해주, 사할린으로 쫓기듯 떠났다가 돌아오지 못한 우리의 할머니 할아버지들, 징병과 위안의 이름으로 꽃다운 청춘을 버려야 했던 아들과 딸들, 삭풍 속에서도 희망의 불씨를 지피고 나라와 가족을 꿋꿋이 지켜내 온 우리 민족의 강인한 흔적들, 그리고 이역만리 100년의 시간을 돌아, 할머니 할아버지의 나라에 다시 둥지를 튼 골목의 고려인 식당들 모두가 우리 민족이 간직해야 할 아픔과 영광의 역사들입니다. <편집자주>
 

부산 '증산공원' 박상철 화백作


대한민국 제2의 도시, 부산광역시. 무역 항구이면서 화려한 관광의 도시 그 이면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일제강점기, 6.25전쟁까지 역사의 희로애락을 함께했던 최전선의 이야기들이 드리워져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은 내륙으로 가기 위한 첫 번째 목적지로 이곳 부산을 공략했고, 조선의 백성들은 우리 땅 부산진성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놓고 처참하게 싸웠다.

부산시 동구 좌천동에 위치한 증산공원과 범일동의 자성대공원에는 한반도에 있는 다른 성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이가 맞물리는 듯한 일본 특유의 견치식 축성법으로 지어진 왜성이 있다. 임진왜란으로 부산진성을 함락시킨 일본은 그 성을 헐어 현재의 증산공원과 자성대공원 일대에 성을 쌓아 군사적 요충지로 활용했다.


자성대공원에 위치한 부산진성에서 서문 역할을 하는 금루관(金壘關). 이곳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이름하여 부산진지성으로 쌓은 성이다. 부산진성이 모성(母城)이란 의미에, 자성(子城)을 산 정상에 설치하고 장대를 세웠다는 뜻으로 일명 ‘자성대(子城臺)’라고 한다.


남요인후(南徼咽喉), 서문쇄약(西門鎖鑰)


언급한 바와 같이,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원래 지금의 증산공원에 있던 부산진성이 임진왜란 이후에는 현재의 부산진성 일대로 옮겨지게 된다. 그 좌우로 성곽우주석이라고 하는 큰 돌기둥 두 개가 서 있다. 원래 부산진성의 서문 자리였던 부산의 성남초등학교 교정에 있던 이 돌기둥 두 개를 1975년에 부산진성 정화 공사때 현재의 서문인 금루관을 복원하면서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남요인후(南徼咽喉), 서문쇄약(西門鎖鑰)의 뜻을 우리말로 풀어보자면 ‘이것은 나라의 목구멍에 해당하는 남쪽 국경이라, 서문은 나라의 자물쇠와 같다’라는 뜻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치면서 왜적을 경계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시대 정신을 담은 ‘항전’ 유물들이다.
 


일제 침략의 시작점이었던 부산.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는 450km. 일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는 250km. 반갑지는 않지만 일본과 가까운 지역이었던 부산의 수난은 어쩔 수 없는 운명이었을까?


부산의 3대 명산으로 꼽히는 용두산. 이곳에도 지리적 역사적 최전선의 아픈 역사가 서려있다. 일본과 한반도를 잇는 중요한 뱃길의 종착점이자 시작점이었던 부산,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부산에 거주한 일본인들의 정신적 안식처 역할을 해오다가 1945년 화재로 사라졌지만 일제 강점기 시대에 일본 선박의 무사 항해를 기원하던 ‘신사’가 용두산 정상에 자리하고 있었다.


또 6.25전쟁 피난민에게 당시 용두산은 그 전에는 사람들이 살지 않았던 고갯마루나 산자락 곳곳에 판자촌과 움막들을 짓고 전쟁을 피할 수 있게 해준 최후의 피난처이기도 했다.


일본의 대륙침략 전초기지로 시작해, 한국전쟁의 고비를 넘어 현재는 부산 동아대학교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부산 임시수도 정부청사. 압도적인 규모와 위엄이 넘치는 외관은 한때 공포의 상징이기도, 신뢰의 상징이기도 했다.


원래는 일제가 경남도청사를 진주에서 부산으로 옮겨오면서 도청 역할로 쓰기 위해 만든 건물이었지만, 6.25전쟁 때에는 임시수도의 정부청사로 쓰였었고 전쟁 이후에는 다시 경남도청사로 쓰이다가 그 이후에는 법원이나 검찰 청사로 쓰였다가 현재는 부산 동아대학교가 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는 건물이다.
 


일본인들에게는 침략의 최일선에 노출된 곳이었고, 6.25전쟁때는 반드시 지켜내야 할 최후의 보루였던 곳 부산. 역경과 수난의 근현대사를 넘어서 눈부신 발전을 이어온 부산. 부산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제 몫을 다하고 있는 우리 민족의 누님 같은 도시다. /박진관 기자 nomadp@sedaily.com

도움말 : 권기봉 작가, 고영 음식문헌연구자, 유성호 문화지평 대표, 이훈 이야기경영연구소 대표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 서울경제TV(www.sentv.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페이스북 공유하기 트위터 공유하기 카카오톡 공유하기 네이버 블로그 공유하기

0/250

0/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