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번 국도 이야기] 빨간 마후라의 탄생 ‘강릉’

이슈&피플 입력 2022-09-23 10:44:35 수정 2022-12-13 08:10:29 박진관 기자 0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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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이 시작된 도시, 전쟁 이후에도 계속된 수난

가치 있는 정보를 제공해 온 서울경제TV는 지난해에 이어, 우리가 가볍게 지나쳐 온 역사 유적과 유물에 대한 아카이브 기획 취재 '골목의 역사를 만나다'를 통해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과거의 아픈 흔적들을 다시 한 번 되짚어 보고 오늘의 대한민국이 누리고 있는 눈부신 과학기술의 발전과 문화적인 성과들이 험난한 시대를 지나온 선조들의 의지와 극복 과정을 통해 이루어 진 역사임을, 자라나는 미래의 세대들에게 제대로 알리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통한 이번 기획취재물 '7번 국도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은 '6.25 전쟁'을 주제로, 흔히 관광지로만 알고 있는 동해안 7번 국도의 잊혀 가고 있는 이야기를 발굴하고 70년간 오롯이 간직하고 있는 전쟁의 아픈 흔적들의 의미를 되새기며 다시는 반복되지 말아야 할 역사의 증거로써 보존해 나가야 함을 강조하려 합니다.


우리의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꽃다운 청춘의 시대를 바쳐야 했던 아들과 딸들,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희망의 불씨를 지피고 나라와 가족을 지켜낸 책임감과 끈기, 그 역사적인 삶의 속살들을 이제 하나씩 시작합니다. <편집자주>
 

북위 37도. 푸른 바다와 모래 해변에 해송숲이 멋들어진 도시 강릉.


1950년 6월25일 새벽 3시경, 당시 강릉일대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6·25 전쟁 발발시각으로 알려진 새벽 4시보다 1시간 먼저, 북한군 육전대 제549부대 1개 연대는 강릉 정동진에 선제 공격을 감행했다.


그 중 1개 대대는 강릉 도심을 향해 북상했고, 또 하나의 대대는 강릉 옥계 방향으로 남하했다. 다시 말해 강릉 일대가 바로 6·25 민족 전쟁의 시발지였던 것이다. 


전쟁의 상흔과 함께 분단이후 계속되었던 북한의 침투 역사가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는 강릉 통일공원에는 무심한듯 동해 바다를 향해 안치된 ‘삼학도의 묘’가 있다.


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 등의 기사를 전단으로 제작해 거리에 배포하고 아군의 강릉 입성을 환영하기 위해 태극기를 제작하던 학생들 4명이 인민군에 붙잡히게 된다. 그 중 한 명은 도망치는데 성공했지만 나머지 세 명은 인민군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었는데 그 세 명과 함께, 도망치는데 성공했던 한 분을 합쳐 총 네 분의 영령을 모셔 놓은 곳이 바로 '삼학도의 묘'이다.


이 ‘삼학도의 묘’는 1950년 전쟁 당시 강릉지역 청년 학생들의 반공활동을 기리는 곳이면서, 이데올로기 시대 반공 학생운동의 상징적인 곳이 되었다.

박상철 화백 作

응봉전투, 큰골전투, 부연동전투 등 마을마다 크고 작은 전투가 끊이지 않았던 강릉은 그 만큼 숨은 영웅들도 많았다. 


1951년 강릉기지에 ‘제10전투비행전대 강릉 전투중대’가 편성되면서 전투기 12대와 전투조종사 26명이 실전에 투입되었고, 1951년 10월 11일부터는 우리 공군의 첫 단독 출격이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우리 공군은 휴전 협정때까지 총 108명의 조종사가 F-51(머스탱)전투기로 7,851회의 폭격작전을 수행했다. 특히 유엔 공군이 500회 이상을 출격하고도 성공하지 못했던 '평양 승호리 철교 차단 작전'을 우리 공군이 해내게 된다. 


'평양 승호리 철교 차단 작전'은 당시 강릉 전투비행전대 소속 김두만 소령을 편대장으로 한 6대의 전투기가 무려 450m의 초저고도에서 폭탄을 투하한 작전으로 철교 폭파에 성공하면서 북한은 보급로가 차단되었고 물자 수송에 막대한 지장을 받게 되었다. 또한 이 작전은 우리 공군의 독자적인 작전 능력을 확인하게 한 대표적인 전투이기도 하다.


다만, 전쟁 중 강릉 제10전투비행전대에서만 11명이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들을 기리기 위해 현재 강릉 공군 제18전투비행단 기지 내에는 ‘공군 강릉기지 전공탑’아 세워져 있으며, 매년 6월 25일에 추모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1953년 6.25 전쟁은 끝났지만, 이후에도 강릉의 수난은 계속되었다.


1996년 9월 16일 밤 11시 30분경, 북한 잠수함 한 척이 남쪽으로 침투하는 과정에서 어선 그물에 걸려 돌아가지 못하고 좌초한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택시기사가 잠수함을 발견하고 신속히 신고하게 되었고, 승선해 있던 북한군은 잠수함을 버리고 북한까지 걸어서 이동하려 했다. 그러나, 이후 국군은 45일간의 치열한 추격 끝에 북한군을 전원 사살 또는 생포하며 마무리된 사건이 있었다.


강릉은 서해안에 비해 바다 깊이가 깊고, 매복해서 침투하기 좋은 자연 조건이다. 그래서 6·25전쟁때도 그렇고, 그 이후에도 북한군의 주요 침투 경로로 이용되던 곳이다.

그러나 근자에 들어 동해안을 따라 걸쳐 있던 안보 철조망이 하나 둘 제거되고 있고, 그 아름다운 7번국도 해변은 점차 국민들에게 휴양지로 개방되고 있다.

또한 강릉역에서 제진역 사이의 동해북부선 111.7km의 철도도 건설 중에 있다. 동해 북부선이 개통되고 북쪽의 금강산역까지 연결된다면 제진역에서 금강산역까지는 불과 50분이면 닿는 곳이 된다. 지척의 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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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국도 도로 옆을 따라 늘어서 있는 기찻길을 따라, 시베리아를 지나 파리까지 가는 열차 여행이 멀지 않은 장래에 현실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박진관 기자 nomadp@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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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 국도 이야기, 고성편으로 이어집니다.>


도움말 : 권기봉 작가, 이훈 이야기경영연구소 대표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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